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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같은 산행 -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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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94회 작성일 20-01-1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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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하늘이 닭털같은 눈발로 가득찼다. 그렇게 시작한 눈보라가 거센 바람과 함께 그녀와 동료들을 수십만 갈래의 채찍처럼 후려쳤다. 대체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늘어선 줄이 점점 길어지고 그나마 체력이 남아있는 자들도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곡에 눈이 덮이자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이젠은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여 오히려 발에 매달린 거추장스런 금속추처럼 느껴졌다. 걸어간다기보다는 미끄러져 내려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사람들은 바닥을 기었는데 엉덩이로, 넙적다리로, 심하면 등을 대고 내려갔다.

해가 급격히 빛을 잃어 사위가 마치 밤처럼 캄캄해졌다. 준비해온 랜턴을 켰으나 뱀처럼 띠줄로 엮여져 콩알 흩뿌리듯 날아드는 눈보라만 비춰질 뿐이었다. 후드를 뒤집어 쓴 탓도 있겠지만 바람소리 자체가 너무 대단해서 그녀의 고막을 터뜨릴 듯이 메워버린 탓에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차츰차츰 길을 잃어 사람들과 떨어진 시점이 아마 그 정도였을 것이다. 그녀와 동료들은 더이상 그 눈보라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전열을 흐트러뜨리며 한명씩 낙오되고 말았는데 대부분이 산행초보인 그녀들로서는 무리도 아니었다.

바람은 이곳저곳에서 메아리치고 중폭되었으며 눈회오리를 수증기처럼 피워올려 마치 사방에서 들끓고 있는 액화질소통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호흡은 제기능을 잃고 신체가 요구하는 산소량에 턱없이 미달하며 곧 사점에 도달했다. 기온은 더욱 떨어져 그녀의 값비싼 고어텍스 등산화가 자랑하는, 겉창에서부터 미드솔,릿지보드,인솔로 이어지는 두꺼운 절연체 바닥도 얼음처럼 굳어버린채 그녀의 발을 얼려버렸다. 그날 저녁 그 산에 몰아친 눈보라는 영하 10도의 추위에서 순간 최대속도가 초당 15미터를 기록하며 시계를 1미터 내외로 줄여버린 기록적인 눈보라로, 러시아에서 푸르가라고도 하고 미국에서는 블리자드라고도 부르는 눈폭풍이었던 것이다. 그 폭풍 속에서 느껴지는 체감온도는 영하25도였다.



매저키즘에 관한 가장 천재적인 분석은 들뢰즈에 의해 이루어졌다. 가장 간단히 말해서 들뢰즈의 주장은, 매저키스트가 고통을 쾌락으로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우리는 불필요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저키스트는 고통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고통은 오로지 만족을 얻기위한 필수조건일 뿐이다. 매저키스트는 고통을 진행시키는 방법을 법으로 여기고, 법을 처벌 과정으로 간주하며,스스로에게 처벌을 요구한다. 그러나 처벌이 끝나면 지금까지 법이 금지해 왔던 쾌락을 경험할 자격이 주어진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매저키스트는 고통으로 속죄를 받으며 언젠가 도래할 쾌락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저키즘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그들을 맞이할 열락과 환락의 천국이,그들에게 문을 활짝 열 그 순간을 위해 하얗게 냉동되어 멈춰버린 시간 위에서 긴장과 스릴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성욕아래 모든 교양. 579쪽.위르겐 슈바인슈타이거 지음. 편두석 역.-



열 시간이상을 혹한과 눈발에 시달린 끝에 저체온증에 빠져버린 그녀의 몸은,태울 수 있는 포도당을 모두 태우고 나서,다음 단계로 단백질을 분해하여 땔감으로 사용했으며,이제 마지막으로 지방을 분해해 태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적당한 운동을 하며 매끈하게 가꿔온 그녀의 복부와 엉덩이엔 이럴 때 사용할 군더더기 지방분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추위에 대응하는 격렬한 떨림조차 잦아들었다. 다리와 허리에 무기력한 통증이 주기적으로 밀려왔고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밭이라도 상관없으니 어디라도 좀 쉬었다 가고 싶을 정도로 피로했다.

그녀는 산행에 익숙한 편이 아니었고 게다가 겨울산행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저체온증에 대한 상식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자신의 상태로 보아 체온이 31도까지는 떨어졌을 것이다. 이런 상태가 좀 더 지속되면 혈액이 끈끈해지고 산소포집 능력이 떨어지면서,지속적인 산소결핍으로 시달린 그녀의 뇌는 부종을 일으킬 것이다. 그전에 먼저 환각이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는 한참 전부터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영상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지난 주에 먹었던 감미로운 텐더로인 스테이크의 영상이었다.

붉은 색의 깔로로시 와인에 재어놓아 향기롭게 와해된 부드러운 안심 육질,그리고 그 위에 샐러드유와 버터를 잔뜩 녹여 그릴에 구워낸 다음,진한 육수에 토마토와 월계수 잎,당근,샐러드,마늘,양파를 넣어 조린 소스를 들이부어서 만들어낸,감칠 맛 나는 적갈색의 미디엄 스테이크 영상이 그녀의 머릿 속을 온통 차지해버린 것이었다. 그녀가 그 고기에 낭만적인 꽃무늬 문양이 암각된 포크를 들이밀었을때,고기는 마치 게맛살 찢어지듯이 결결이 뜯어지며 선홍피로 물든 속을 드러냈었다. 정말 맛있었지만 그녀는 체중조절 때문에 그때 고기를 남겼었다. 그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 몇점의 고기만 지금 있었더라면..만약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적어도 스테이크 20개 쯤은 먹어치울 수 있을거 같았다.

피로의 강도가 높아졌다. 다리를 들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근육이 심하게 경직됐다. 졸음이 쏟아지고 그러는 와중에도 소변이 마려웠다. 그녀는 눈을 한웅큼 집어서 입에 넣고 씹었다. 약간이라도 정신이 나게 하려고 한 행동이었으나 턱이 떨어져 나갈 만큼 고통스러웠을 뿐 의식은 마치 불투명한 간유리 속에 갇힌 것 마냥 희미했다. 다들 어디갔을까. 그녀는 어느 커다란 나무 밑에 몸을 뉘였다.



다시 그녀의 차례였다. 그녀는 잠시 여유를 갖고자 움막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좀 전에 먹었던 라면봉지가 눈에 띄었다.

"얼마 전에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했던 안도 모모후쿠라는 일본인이 심장마비로 죽었지요. 96세였어요." 그녀는 흥미롭게 읽었던 신문기사 내용을 읊어댔다. "일청식품이라는 일본 1위의 라면회사 회장이었고 50년 가까이 점심으로 라면을 먹은 것으로 유명하죠. 그렇게 거의 하루도 거르는 일없이 라면을 먹어대면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라면이 해롭다는게 거짓말이라는 주장이었대요." 그녀의 설명이 장황해지자 사내가 눈쌀을 찌푸렸다. "내고 싶은 문제가 대체 뭐야,이 년아." 그녀는 못들은척 계속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가 개발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인스턴트 라면은 순간유열건조법이라는 유탕처리기술이었어요. 아내가 튀김을 하는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더군요. 아저씨,이런 얘기에서 뭐 느끼는 거 없어요? 없다구요? 안도라는 사람이 아내 일을 열심히 도와주고 또 유심히 아내를 지켜봤기 때문에 라면을 만드는 신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거예요. 다시 말해서 여자를 존중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구요. 안도처럼요. 아시겠어요?" 사내가 못참고 또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이 년아. 문제가 대체 뭐야?"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이번 문제는 이거예요. 라면의 뜻이 뭐겠어요?" 사내가 욕설을 퍼부었다. "이 년아,뭐 이래 사설이 길어.라면이 무슨 뜻이냐고 그러면 되지."

그녀가 팔짱을 끼었다. "문제나 맞히시죠." 사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건방진 년.한번만 걸려봐. 아주 젖이랑 보지랑 벗겨놓고 가래떡 씹듯이 잘근잘근 씹어줄테니까. 펑펑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때까지 말야. 알았냐. 그러니까 계속 까불어 봐..라면 뜻이 뭐야,이 년아." 사내의 거친 말에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납면이예요." "납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년아,납면이 뭐야? 너 납면이 뭔지나 알아?" 그녀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중국에서 유래된 면 만드는 방식이예요. 짜장면 만들 때 반죽을 바닥에 치면서 손으로 계속 접어서 면을 만드는거 본 적이 있을거예요. 그쵸? 굵은 1줄짜리 반죽을 한번 접어서 늘리면 2줄이 되고,그걸 또 꺾어 접고 바닥에 치면서 늘리면 4줄이 되는 방식,봤지요? 이렇게 면줄이 제곱으로 늘려가며 면을 만드는 방식을 납면이라고 하는 거지요. 근데 일본에서도 역시 전통적인 방식의 라면을 이렇게 납면으로 만들었던 거예요. 납면을 일본말로는 라멘이라고 부른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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